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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4. 14世 〉34. <부정공>동천공휘유검정려기(東川公諱有儉旌閭記)
1. 문헌 목록 〉14. 14世 〉36. <부정공>남산재기(南山齋記)휘진구(諱晋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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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부정공>만락정중수기(晩樂亭重修記)휘유원(諱維元)
晩樂亭重修記 昇平之郡鳳山之東有亭翼然名曰晚樂者故上舍仙川趙公攸芋也夫古之君子有蔬食水飲枕肱而樂者有簞瓢陋巷不改其樂者或有強仕老歸而樂者盖其樂也不一公之所樂是何事歟竊就公所詠八景而揣之雲山霞洲風篁水月足以適宜逍遙灑落胷襟則其曠閒之境優逸之趣槩可見矣且讀性潭文敬公題墓之文公性至七歲遭艱哀痛如成人及長遊華陽文正公之門見推重於儕流四十中生員自是專意于經籍蒔花種竹隨處成就居家誼行甚爲宗黨鄉隣所稱賞於是焉益可見公之賢矣然則公之所樂非特擺脱名韁優游仙洲而止耳亦可謂反身知命乎苟能反身知命則古君子瓢飲枕肱之樂終亦可幾矣意者公之晚景求樂抑亦在斯而若強仕老歸之事付諸浮雲一邊歟然微斯亭公之樂可叩於何微斯樂亭之美豈傳於後噫世人於祖先遺傳之物富貴則忘之貧賤則失之鮮能保百年舊物物之興廢固有數而亦豈不係於基本之深淺後承之賢否耶今趙氏舊築閱累百載隨毀而重新之風楹月榭宛然若昔日顔色公之所以基本者可知其深後承之所以肯搆者亦賢矣哉雖然肯構堂宇乃紹先之餘事又有大焉盖公種學飭行既有所受以之壽後胎業則凡其後承必善繼於此善述於此此於無忝之道亦非至樂乎斯亭優游之樂雖不同而必樂此而後斯亭之美庶亦無壞於永世趙氏乎可欽念哉其殫誠亭役者公之七代孫淇晟也使其族永學屬余識實云 德殷 宋秉珣 記 만락정중수기(晩樂亭重修記) 승평군(昇平君) 봉산(鳳山)의 동편에 만락(晚樂)이란 이름을 가진 높은 정자가 있으니 이 곳은 고 상사선천(故 上舍仙川) 조공의 큰 꽃이었다. 대범 옛적에 군자는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워 그 즐거움을 만끽한 자가 있고 도시락과 표주박으로 누추한 시골에서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아니한 자도 있으며, 혹 젊어서 벼슬하다가 늙고 나면, 林泉으로 돌아와 여생을 즐긴 자가 있다. 이렇듯 그들의 즐긴 바가 같지 아니하였는데, 그렇다면 공이 즐긴 바는 과연 무엇이었던가. 내 나름대로 공이 읊은 八경에 대하여 언급하면, 구름이 감도는 산과 안개 낀 물가(雲山霞洲)며, 바람결에 우짖는 대피리 물에 잠긴 달(風篁水月)이 들 속에서 여유작작한 생활을 하며 가슴이 확 트이게 하였으니, 여기에서 공의 유한(幽閑)한 경지와 초일(超逸)한 지취를 대강 볼 수 있다. 또 성담(性潭) 문경공(文敬公)이 묘도에 쓴 글을 읽어보면, 공은 타고난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운 나머지 七세에 상사(喪事)를 당하여 어른같이 애통해하였다. 장성하매 화양(華陽) 문정공(文正公)의 문하에 놀며, 동료에게 추중을 받았고, 四十세에 생원에 합격하여 이로부터 학문에 전심하였고 집 주위에는 꽃과 대를 심어 곳곳마다 푸른빛에 싸이게 하였으 며, 가정에 모범이 된 공의 행실은 종당과 향인의 심히 칭상한 바가 되니, 여기에서 더욱 공의 훌륭한 면을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공이 즐거워한 바는 특별히 화려한 명예를 떨쳐 버리고 선주(仙洲)로 돌아와 優遊하며 지냈던 그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또 가히 몸을 돌이켜 명을 안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진실로 몸을 돌이켜 명을 안다고 한다면, 옛 군자들이 표주박으로 마시고 팔베개로 느끼던 즐거움을 마침내 거의 맛보았다 해야 하겠다. 뜻하건대, 공의 말년에 즐거움을 탐한 것은 오로지 이에 있고, 젊어서 벼슬하다가 늙어서, 돌아온 일 같은 것은 모두 뜬구름 한 가닥에 부칠 일이다. 그러나 이 정자가 아니면, 공의 즐거움을 가히 어디서 찾을 것이며, 이 즐거움이 아니면 정자의 아름다움을 어찌 뒤에 전하겠는가. 아! 세상 사람이 선조가 유전한 물건을 부귀하면, 잊어버리거나 빈천하면 잃어버려 능히 백년 구물을 보존할 자 적으니, 물건의 흥하고 폐함이 진실로 수가 있고 또 일찍이 기본이 깊고 엷으며, 후손이 어질고 나쁜 데 매이지 아니한 것인가. 오늘날 조 씨의 옛 건축이 수백 년을 지내 오는 동안 헐어진 것을 또다시 큰 기둥과 들보를 새로 세워 완연히 옛날 안색과 같게 하였으니, 공이 기본(基本)한 바가 가히 깊고 두터움을 알겠고, 후손의 승계한바 또한 어질다 하겠다. 그러나 선조가 이룩한 일을 이어받는 것은 이에 선영을 이은 보통 일이거니와, 그보다 더 큰일은 대개 공이 학문을 심고 행실을 꾸미니 이미 받은 바 있고, 이로써 뒤를 덮어 감싸고 업을 준 것인즉 무릇 그 후손은 반드시 잘 이를 잇고 착실히, 이를 기술함으로써 이것이 또한 욕되게 아니한 도리이니 또 지극한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이 정자에서 노는 즐거움이 비록 같지 아니하나 반드시 이를 즐거워한 뒤에 이 정자의 아름다움이 가히 또 영세토록 유지될 것이니 조 씨를 위하여 가히 흠탄할 일이로다. 이 일에 정성을 다한 자는 七대손 기성(淇晟)인데, 그 종인 영학(永學)을 보내 나에게 사실을 기록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덕은(德殷) 송병순(宋秉珣) 씀 註: 송시열(宋時列: 一六0七〜一六八九) 학자. 노론(老論)의 영수(領袖). 본관은 은진(恩津). 호는 우암(尤庵). 一六七一년 우의정에 기용 이듬해 좌의정이 되는 등 크고 작은 많은 벼슬을 역임하였으며 숙종 十五년 세자 책봉의 일로 왕의 노염을 사서 사사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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